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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종 서사창작과 폐지에 반대하며...

이야기꾼 세라자드

by 이야기꾼 세헤라자드 2009. 6. 18.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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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의 작금의 사태에 대해서 한예종 지못미프로젝트를 제안한 독설닷컴블로그 기자의 글을 보고 동참하고자 하는 생각을 진작부터 하였으나, 바쁘지도 않으면서 관리가 안 되는 일상에 부대끼다  오늘은 게으름에 끝을 내는 기분으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이랄까.  몇 년채 해답을 차지 못하고 방황중인 내가 매달리는 작업들에 정당성도 나름 세워보고 싶은 욕심이다. 왜냐면 내 밥줄(?)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나의 상황은 서사창작과 서사이론 연구가 끝내지 못한 내 숙제로, 밥줄은 고사하고 개인경제 파탄의 주범이긴 하지만 말이다. 

      한예종 감사결과, 이론수업의 축소와 서사창작과의 폐지안이 상정된다는 것은 과거의 억압적 서사를 역행적으로 재출현 시키는 것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해 문화말살의 실례라고도 보고 싶다. 내 개인의 경험을 좀 늘어놔 본다면,  나는 대학졸업 후 전공이었던 영문학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이유는 한국 땅에서 영어영문학이란 외국문학 전공자에게 사회에서 필요로하는 것은 영어지 문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목표가 바뀌고 다시 영문학을 차근히 공부하기 시작하고서야 언어와 문학과 삶을 일치시키기 시작하였다.  생활과  언어와 문학을 따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나를 포함해 서사, 문학에대한 오류는 생각보다 넓고 깊게 퍼져있는 것 같다.  유학시절 정치학을 전공하는 한국인 친구가 지도 교수에게서 글의 논리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고 심각한 고민을 하기에 내가 오지랍 넓게 도와 준답시고 나선적이 있다.  그러나 내가 들은 답은 영문과는 영어 소설이나 시 읽고 쓰는데 아녜요?  언니는 글의 논리 필요없잖아요.?”  내가 잘난척한다고 오해했다거나,  빈정이 상해 내뱉은 말일 수도 있지만 그곳이 영국이었단 점을 감안하는 영문과는 우리나 국문과였던 셈 인데 수사학과 글의 구조 분석말고 내가 영국소설 읽고 번역하러 유학까지 왔단 말인가 하고 기가 차 했었다.  내 전공이 서사의 의미와 재창조란 것을 아는 그녀가 내게 던진 말에 허무함, 새로운 서사양식과 존재의 의미를 찾아 돈과 시간을 몽땅 투자한 연구가 하루아침에 날조라고 판정 받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느낌을 얼마 전 유인촌 문공부 장관이 자전거 타고 일인 시위하는 서사창작과 학부모에게 세뇌 당하셨다며 던진말에서 다시 받았다.  서사를 한낱 유희로 치부하려는 특히 좌파들들의 국민세뇌 도구인냥 무시하면서도 서사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요는 아무 거리낌없이 잘못사용하고 있다는 동질성을 보았다.  

유장관: “(서사창작과) 잘못된 학과라서 그래요

학부모: “잘못된 학과라니요?”

유장관: … “괜히 고생하지 마세요

과연 누가 세뇌하고, 누가 잘못인가?   한 나라의 문화를 책임지는 사람이 서사창작은 가르치고 배울 필요가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은 그 시대의 문화를 부정하는 것이라 고도 할 수 있다.  문화란 사회 구성체의 서사의 집합이랄 수 있기 때문이다.  , 삶 자체가 이야기이고, 따라서 우리는 인간문화의 모든 현상 속에서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소설, 서사시, 영화, 만화, 게임 그리고 미술, 무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술과 신문기사에서 정치 연설문등 인간의 삶을 대변하는  모든 것이 서사의 법위에 든다.  따라서 소설의 허구가 가치있는 것은 인간 삶의 재현이기 때문이고 온라인 게임이 재미있는 것은 서사의 주인이되는 특권을 누리기 때문이듯 서사란 사회문화 현상의 생산자이다.    

    서사란   이야기와 이야기 전달 방식인 담론으로 이루어진다. 이야기는 한 인간이 시간, 장소, 우발적 행동(사건)이 개연적으로 발생한 것이고 담론은 말이나 문자, 이미지 같은 기호들을 이용하여이 을 일정하게 배열한 것이다.   서사가 완성되려면  이야기가 형성되고 전달되는 과정인 담론이  필연적으로 결합되어야한다. 즉 이야기와 이야기하기(story telling)과정까지 말하는 것이다. 조금 더 풀이해 말하자면, 하나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말하기(telling)가 필연적으로 따라야 한다.  그런데 담론에 따라 서사는 변한다.  지식생산 자체가 다변화되고 대중화되는 탈경계, 다매체, 탈전통화 그리고 세계화의 시대의 담론은 다양한 학문과 제도의 경계를 가로지르면서 지식과 상징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형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론이 푸코식으로 보면 통제와 억압기제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모든사회의 담론의 형성, 유통, 분배, 소멸은 권력작동과 뗄 수 없는 연관을 지닌 것으로 보았는데, 권력은 대상을 지식을 통해 배제하고 억압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적극적으로 개인을 구성하고 대상들을 생산하고 주체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과거 전제, 독재 체제들은 말하기 즉 담론의 형성이나 소통을 용납하지 않고 일방적 말하기만 하였던 것이다.

     좀더 극단으로 가보면  장 보드리아르(Jean Baurillard)는 ‘흔적과의 게임(Game with the Vestige’이라는 인터뷰에서 이전 사회의  중심적 항목들이 소멸한 사회 속에 우리가 있다고 말한다. 실례로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주인공 알마시(랄프 파인즈 역)  전쟁의 불길이 꺼지지 않은 사막에 살아났지만 과거를 잊었기에 과거를 말하지 않기에 현실에서 그의 유일한 흔적인 책 덕분에 그저 ‘영국인 환자’로 명명되어질 뿐이다영화 속에서 알마시 백작은 사막에서 부상당한 캐더린에게 말한다. '사흘동안 사막을 걸아가 구조비행기를 타고 3시간만에 돌아오리라...'. 그러나 알마시는 삼일만에 돌아오지 못한다. 단지  그의 이름이 영국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독일군 첩자로 오인 받고 주체성을 박탈 당한다.  알마시의 약속처럼 우리의 다부진 약속들은 사회라는 거대 그물망에 걸려 우리의 약속 이행이 지연된다. 우리가 실체이기 보다 지시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서사의 부정은 존재의 부정과도 일맥상통한다. 왜냐하면 서사란 욕망은 인간을 끓임없이 부추추기며 대리 만족감을 갈구한다.  왜냐면 당신도 나도 죽지 않았기에 삶의 완성이 주는 충족감을 모르기때문이다. 죽음의 공포는 인간이 자신 현재 어째서 살아 있는가를 묻게 만든다.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이유, 즉 자신의 정체성을 원한다. 그런데  총체화되기 어려운 그래서 의미화가 힘든 우리 인생과 달리, 시작과 끝의 서사  과정 속에 우리는 우리 삶의 의미를 찾아낸다. 따라서 서사 창작과 욕망의 충족의 욕구의 반복은 삶에 대한 열정과 창조의 욕구이다.  

 나는 한예종의 위기가 특히 서사에 대한 부정은  존재의 의미를 쫒는 욕구의 억압이며 국민의 삶이 무시된 처사를 벌이는 현 문화정책의  막장 서사창작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서사 창작이 무의미하다고 보는 태도는 문화전반을 피폐화시키고 위축시킨다.

마치 시청자의 욕망과 충족을 무시한 서사인 충족없이 욕망만을 자극하고 부추기는 막장 드라마류의 문화 양산을 부추기기고 빈약한 서사대신 CG로 의미없는, 지시대상없는 환영(simulacra)의 영화들을 양산할 따름이다.   보드리야르가 자본의 힘은 실재를 기능을 점점 약화시켜 이미지와 욕망만이 남아, 실재가 기호로만 존재하는 복제의 시대에 도달해 있다 했듯 생산이 소비에 압도돼 버린 시대를 정부가 나서서 부추긴다면 한국 문화는 이제 과거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남대문처럼 문화는 정체되어 흔적과 향수만 남긴채 사라질것이다

  나는 바라건 데 현 정부가 서사의 기능을 좌파 지식의 세뇌로 치부하기 앞서 우리 사회에서의 소수자인 타자문제, 절차적 민주화 이후의 권력과 지식의 상관관계 및 급속한 경제적·사회적 변화에 따른 새로운 언어 경험들의 출현과 확장으로 변화하는 우리 사회에서의 규범들과 규칙들 그리고 체계들을 읽어내길 바란다. 서사 창작을 부정의 힘으로 몰지 말라.  아라비안 나이트의 천 하루를 이야기함으로 목숨을 구하고 광포한 왕까지 변화시켰던 이야기꾼 세레자데를 보라. 서사는 긍정의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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